조재옥
[대한민국명강사신문=조재옥 ]
김기승 작가의 첫 장편소설 '운명을 걷다'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 품어봤을 의문을 정면으로 다룬다. "내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가, 아니면 내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가?"
철호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펼쳐지는 이 소설은 운명을 내다보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운명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그린다. 22살 때 독재 권력에 의해 받은 트라우마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령 선포로 되살아나면서, 그는 4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과거와 맞닥뜨린다.
소설은 철호가 어린 시절 큰스님으로부터 "스무 살 언저리를 조심하라"는 예언을 듣고, 후에 자신도 타인의 운명을 읽는 능력을 갖게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그 능력은 축복이라기보다 짐에 가깝다. "남의 운명을 봐준다는 것은 업을 짓는 것"이라는 스님의 가르침처럼, 철호는 자신의 능력과 그에 따른 책임 사이에서 갈등한다.
작품의 백미는 운명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다. "인간은 운명을 벗어나지는 못해. 그런데 말이다, 철호야. 인간은 운명을 바꿀 힘은 있단다"라는 구절은 결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포착한다. 김기승 작가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인간의 작은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변화의 가능성을 조명한다.
시인으로 활동해온 작가의 섬세한 언어 감각이 돋보이는 이 소설은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개인의 삶이 어떻게 얽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의 선택이 갖는 의미를 깊이 있게 탐색한다. 특히 2024년 비상계엄이라는 가상의 사건을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가 현재로 소환되는 장면은 역사의 반복성과 개인의 무력함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충남 청양 출신으로 1999년 문단에 데뷔한 김기승 작가는 그동안 7권의 시집과 30여 편의 저술서를 출간했으며, '운명을 걷다'는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김포시 문수산 자락 동막마을에서 작은 정원을 가꾸며 집필하는 작가의 일상은 소설 속 주인공 철호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진다.
2025년 3월 24일 발행된 이 소설은 단순한 운명 이야기를 넘어,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선택의 순간들과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미래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측불가능한 삶의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운명을 걷다'는 그 질문을 품은 채 독자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온다.